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제1제국 (문단 편집) === 쇠퇴기 === 그렇지만 절정기라고 보이던 바로 그 순간에 몰락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이 정복욕은 끝이 없었고, 포르투갈이 대륙 봉쇄령에 참가하지 않는 것을 빌미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침공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발발한다. 현지의 [[게릴라]] 저항 세력과 이들을 후원하는 영국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고전을 계속하고, 이렇게 프랑스군의 주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목이 잡히자 겉으로는 나폴레옹에게 평정당한 듯 했지만 속으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중/동부 유럽에서 다시 반 프랑스의 움직임이 거세지기 시작했던 것. 하지만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삽시간에 관광태우며 아직까지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과시하는 한편, 후계자를 얻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마리 루이즈]]를 아내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이미 프랑스의 인적 동원 능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1805~1814년 동안 무려 150만 명 이상의 프랑스 청년들이 징병되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죽었다. [[군국주의|사회를 구성하는 건장한 청년들을 군사로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국가 생산력이 감소한다. 그걸 막기 위해 나이대가 안 맞는 인원을 동원할 경우 병력의 질의 저하를 가져왔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 제국|러시아]]가 영국, 스웨덴과 연합해서 나폴레옹에게 반항을 시작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지만,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역사에 길이 남을 '''대참패'''였다. 러시아에서의 참패로 다시 고무된 프로이센이 대 프랑스 동맹에 재가담했고, 오스트리아 역시 공주인 마리 루이즈의 안위를 걱정해서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이지 대놓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다. 한편 전쟁에 지친 프랑스 내부에서도 나폴레옹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미 러시아 원정이 한창이던 1812년 12월에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쿠데타 기도가 있었으며, 징집에 반항하는 움직임도 거세졌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먼치킨(클리셰)|먼치킨]]인 자신의 군사적 능력으로 어떻게 어떻게 군대를 재건하고 대프랑스 동맹군들을 몰아붙였지만,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참패로 [[역관광|1814년이 되자 이제 나폴레옹은 이전과는 정반대로 동맹군의 프랑스 침략을 방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고, 결국 파리가 함락당하고 만다.]] 이후 나폴레옹은 1814년 4월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